조충희 굿파머스 연구소 소장
평성으로 가는 길
아직 좀 쌀쌀하지만 봄기운이 완연하게 느껴지는 아침이다. 오늘은 평양을 떠나 평안남도에 대한 취재를 위해 평성으로 간다. 처음 가보는 도시여서인가? 어쩐지 마음이 들뜨고 그 마음을 아는지 사륜바이크도 경쾌하게 동음을 울리며 달린다. 평성은 평양의 위성도시로 전국 상품유통의 중심시장으로 이름난 도시이다.
평성은 평안남도 소재지(행정수도)로. 서부는 숙천군 · 평원군 · 평양시 순안구역, 북부는 순천시, 동부는 은산군 · 평양시 강동군, 남부는 평양시 용성구역 · 은정구역 · 삼석구역과 접해 있다. 현재 행정구역은 20동 14리로 구성되어 있다. 1960년대 중반 평안남도의 행정수도를 평양외곽으로 옮길 데 대한 중앙의 결정으로 평안남도 순천시 사인리를 중심으로 평양시 룡성구역, 순안구역의 일부를 포함하여 형성된 비교적 규모가 작은 신도시이다.
<사진 1> 평안남도 평성시 행정구역
<사진 1> 평안남도 평성시 행정구역
평성은 전국상품유통의 중심지이기도 하지만 시장이 형성되면서 가공의류, 수제가죽구두의 메카로 이름나 있다. 평성사람들은 독특한 아이디어로 디자인을 하고 뛰어난 솜씨로 제품을 정성껏 잘 만들었으며, 특히 중국이나 한국산 제품을 모방하여 소비자의 마음에 꼭 들게 제작해 수요자들을 만족시킴으로써 “평성 가공옷”이라는 이름까지 생길정도로 유명하다. 경제난으로 시장이 형성되고 발달하는 과정에 생활의 변화로 요즘은 국영기업이나 중국산제품을 제치고 평성 산 가공의류와 수제구두, 그리고 수제맥주의 수요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생각을 하며 1시간 남짓이 달려 평성에 도착하였다. 중간에 두 곳의 검문소가 있어 내려서 증명서를 보이고 이동 목적을 이야기 하느라 시간을 좀 지체했다. 평성에 거의 다 와서 잘 꾸려진 동네가 있어 안내원에게 물어보니 과학지구라고 하여 잠간 숨을 들이면서 구경하였다. 한국의 카이스트와 맞먹는다는 리과대학, 자동화연구소, 수학연구소, 과학원도서관, 공원, 교양마당, 과학자 아파트 등이 병풍처럼 늘어선 높지 않은 산자락에 배치되어 있어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평성은 상상한 것보다 작은 평범한 도시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과학지구와 평성의 경계석이 있는 “10만산 고개” 1970년대 평양-평성-순천간 1급도로 건설을 하면서 산 중턱에 도로가 통과하면서 10만산 대발파를 진행한 것을 이유로 평성사람들은 이 고개를 10만산 고개라고 부른다. "10만산 고개1)"를 넘어서니 평성의 ‘랜드마크’라고 하는 18층 아파트가 정면으로 보이고 그리 넓지 않은 도로를 따라 기관건물들과 주상복합건물들이 질서 있게 배치된 그리 크지 않은 도시가 나를 맞아주었다. 마스크를 하고 천으로 만든 백(배낭)을 진 사람들과 자전거와 그루마가 분주히 오가고 가끔 먼지를 날리며 달리는 택시와 화물차가 보이는 평범한 도시이다. 포장이 되어 있음에도 차가 달릴 때 먼지가 날렸다. 내가 탄 바이크에도 그리고 날개옷도 먼지가 장난이 아니다.
평안남도의 국영축산
우리가 도착한 곳은 도, 인민위원회, 도 안전부, 도 보위부 등 도급기관 청사가 밀집되어 있는 평성시 덕성동에 자리 잡은 평안남도 인민위원회 국영목장관리국 청사이다. 왜인지 살짝 어두운 느낌을 주는 청사 앞에서 아담한 체구에 웃을 때 가지런한 흰 이가 눈길을 끄는 중년의 사내가 관리국기사장이라고 하면서 손을 내밀었다.
“오시느라고 수고가 많았습니다.”
기사장은 소박한 체구와 어울리지 않게 우렁우렁한 목청으로 인사하면서 우리를 국장실로 안내 했다.
<사진 2> 평성시 덕성동에 위치한 평안남도 인민위원회 국영목장관리국(출처: 구글어스)
관리국은 딱 봐도 오래된 건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낡은 3층 청사이다. 다른 도시들에 비하면 신도시이기는 하지만 도시가 형성 된지 50년이 훌쩍 넘었으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사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어 국장실이 있는 3충까지 계단으로 올라갔다. 후에 안 일이지만 평성에는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건물이 없다. 도의 노동당청사와 인민윈원회 등 모든 기관청사들에도 엘리베이터가 없다고 한다.
착찹한 생각을 정리하며 3충의 국장실에 들어서니 해맑은 인상의 “국장동지”가 책상에 앉아 있다가 급하게 일어서며 우리를 친절하게 맞아 주었다. 먼저 농업성에서 함께 온 안내자가 나에 대하여 간단히 소개를 했다. 서로 소개와 인사가 끝나자 국장은 사무실에 걸려 있는 평안남도의 행정지도 앞으로 다가서 평안남도와 국영목장관리국에 대하여 설명을 시작하였다.
"평안남도는 산지와 낮은 벌, 구릉 해안, 간척지 등 여러 가지 지형요소들 이루어져 있는데 대체적으로 동부에서 서부로 가면서 점차 낮아지는 지세를 이루고 있다. 또한 적산온도로 볼 때 비교적 높은 온열조건을 요구하는 농작물재배에 유리하여 사료원천이 풍부하고 가축들의 생활환경에 좋은 조건을 만들어 주어 축산물 생산에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평안남도 지역은 도내의 각지에 돼지, 닭, 오리, 소, 염소 목장들이 건설되어 축산업의 물질·기술적 토대가 북한지역에서도 비교적 잘 되어있는 지역이다. 도에서는 국영축산과 협동농장축산, 집단사육과 분산사육을 결합하여 축산을 하고 있다." -『조선향토대백과』 3 평안남도1 (한국평화문제연구소, 조선 과학백과사전출판사,)2004, 43쪽
관리국 기사장은 “자연사료 원천이 풍부한 산간지대에서는 소, 양, 염소와 같은 초식가축을 위주로 하면서 돼지와 가금을 사육하고 있다.”고 자랑도 했다. 예를 들어 맹산군의 긴벌덕, 상수동덕, 민봉덕, 회창군의 중골덕, 백년산덕과 같은 곳에서는 방목에 유리한 조건을 활용하여 초식가축을 방목하여 성과도 있다는 것이다.
북한은 해방 초기부터 축산업에 관심을 가지고 축산부문행정지도기관을 설치하였다. 1947년 3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농림국 축산부가 생기고 각도 인민위원회 농산국에 축산부가 있어 정부의 축산정책을 작성하고 집행하였다.2)
전쟁 이후 생산관계의 사회주의적 개조가 완성되고, 축산물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1965-1966년에 축산업의 전문화, 국영화를 위해 국영목장들을 증가되고, 각도에 종축장도 신설되었다. 1965년부터 1970년대 초까지 축산업을 지대별, 가축별로 전문화한 국영목장들과 국영축산기업소(소, 돼지, 닭, 오리공장 등)들이 신설되었고, 축산업의 규모가 커지게 되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북한정부는 1965년에 내각에 국영가금총국을 설치하고 가금목장들에 대한 행정기술적인 지도를 강화하였으며 방대한 자금을 투자하였다. 이에 대하여 조선중앙통신사에서 해마다 발간하는 『조선중앙연감』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현대적인 설비를 가진 대규모 닭 목장들을 건설하기 시작하여 일부 목장들을 조업시켰으며 앞으로 대규모건설을 계속할 준비도 진행하였다. 이미 있던 목장들에서는 전문화, 집약화를 성과적으로 실행하였다.”3)
1977년 1월 27일 진행된 가금 및 축산일군 협의회에서 중앙이 통일적으로 관리하던 국영목장들과 축산기업들을 각도에 가금 및 축산관리국을 설치하여 관리할 데 대한 김일성의 지시에 의하여 각도 국영축산을 관리하는 국영목장관리국이 생겨났다. 평안남도 국영목장관리국은 국영축산 목장들과 공장들에 대하여 행정·기술적으로 지도하고 관리하는 기구로 정식명칭은 “평안남도 인민위원회 국영목장관리국”이다.
도 국영목장관리국은 내각 농업성 축산관리국과 도 인민위원회에 직간접적인 지시와 통제를 받는다. 관리국은 평안남도내의 국영축산의 경영관리전반에 대한 책임을 지고 국영목장과, 공장들의 행정·기술 관리와 축산물생산계획 작성 및 하달, 종축보장, 수의방역, 사료공급, 노력보장, 재정관리, 자재공급과 축산물 판매 및 공급을 계획하고 집행하는 행정기술지도 기관이다.
국장이하 61명이 근무하고 있다. 국장 아래에 계획과 생산을 담당한 기사장과 행정관리를 담당한 행정부국장 설비관리 및 자재보장, 관리국 내 경리업무를 총괄하는 자재부국장이 있다.4) 산하에 1개의 배합사료공장과 9개의 닭 공장, 5개의 오리 목장, 1개의 국영돼지공장, 1개의 돼지종축장, 1개의 토끼종축장, 1개의 염소전문목장, 2개의 젖소목장 등이 있다.
1960년대 말부터 평안남도의 축산업부문에서는 돼지공장, 닭공장 등 대규모 축산시설들이 만들어지고 시설의 현대화와 대학을 졸업한 우수한 전문가들이 배치되면서 도내 축산물생산에서 일정한 성과가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부터는 경제난으로 식량부족과 사료 사정의 악화 등으로 평안남도의 축산업도 침체상태에 들어서게 되었고, 최근 들어 초식가축위주의 축산정책과 새로운 기업관리체계가 도입되면서 일부 공장들의 개건 현대화를 진행하였지만 아직 원만한 수준은 아니다.
나는 국장님에게 도의 축산업을 운영하면서 가장 애로 되는 것은 무엇인가고 물었다. 50대 후반의 국장은 “제일 부족한 것은 사료와 수의약품”이라면서 말을 아꼈다. 국장의 안내로 관리국청사내부에 있는 연구실과 사무실을 돌아보고 다음 취재를 위해 서둘러 청사를 나섰다. 다음 취재 목적지는 관리국 청사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평안남도 협동농장경영위원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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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70년대 평양-평성-순천간 1급도로 건설을 하면서 산 중턱에 도로가 통과하면서 10만산 대발파를 진행한 것을 이유로 평성사람들은 이 고개를 10만산 고개라고 부른다.
2)『노동신문』 1997년 11월 22일
3)조선중앙연감 1966-1967(평양: 조선중앙통신사, 1967) 216쪽
4) 경리부국장이라고 부르는데 목장관리국 사업에서 연료와 원료 생산자재 등의 보장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에 자재부국장이라고 많이 부른다.
조충희 굿파머스 연구소 소장
평성으로 가는 길
아직 좀 쌀쌀하지만 봄기운이 완연하게 느껴지는 아침이다. 오늘은 평양을 떠나 평안남도에 대한 취재를 위해 평성으로 간다. 처음 가보는 도시여서인가? 어쩐지 마음이 들뜨고 그 마음을 아는지 사륜바이크도 경쾌하게 동음을 울리며 달린다. 평성은 평양의 위성도시로 전국 상품유통의 중심시장으로 이름난 도시이다.
평성은 평안남도 소재지(행정수도)로. 서부는 숙천군 · 평원군 · 평양시 순안구역, 북부는 순천시, 동부는 은산군 · 평양시 강동군, 남부는 평양시 용성구역 · 은정구역 · 삼석구역과 접해 있다. 현재 행정구역은 20동 14리로 구성되어 있다. 1960년대 중반 평안남도의 행정수도를 평양외곽으로 옮길 데 대한 중앙의 결정으로 평안남도 순천시 사인리를 중심으로 평양시 룡성구역, 순안구역의 일부를 포함하여 형성된 비교적 규모가 작은 신도시이다.
<사진 1> 평안남도 평성시 행정구역
<사진 1> 평안남도 평성시 행정구역
평성은 전국상품유통의 중심지이기도 하지만 시장이 형성되면서 가공의류, 수제가죽구두의 메카로 이름나 있다. 평성사람들은 독특한 아이디어로 디자인을 하고 뛰어난 솜씨로 제품을 정성껏 잘 만들었으며, 특히 중국이나 한국산 제품을 모방하여 소비자의 마음에 꼭 들게 제작해 수요자들을 만족시킴으로써 “평성 가공옷”이라는 이름까지 생길정도로 유명하다. 경제난으로 시장이 형성되고 발달하는 과정에 생활의 변화로 요즘은 국영기업이나 중국산제품을 제치고 평성 산 가공의류와 수제구두, 그리고 수제맥주의 수요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생각을 하며 1시간 남짓이 달려 평성에 도착하였다. 중간에 두 곳의 검문소가 있어 내려서 증명서를 보이고 이동 목적을 이야기 하느라 시간을 좀 지체했다. 평성에 거의 다 와서 잘 꾸려진 동네가 있어 안내원에게 물어보니 과학지구라고 하여 잠간 숨을 들이면서 구경하였다. 한국의 카이스트와 맞먹는다는 리과대학, 자동화연구소, 수학연구소, 과학원도서관, 공원, 교양마당, 과학자 아파트 등이 병풍처럼 늘어선 높지 않은 산자락에 배치되어 있어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평성은 상상한 것보다 작은 평범한 도시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과학지구와 평성의 경계석이 있는 “10만산 고개” 1970년대 평양-평성-순천간 1급도로 건설을 하면서 산 중턱에 도로가 통과하면서 10만산 대발파를 진행한 것을 이유로 평성사람들은 이 고개를 10만산 고개라고 부른다. "10만산 고개1)"를 넘어서니 평성의 ‘랜드마크’라고 하는 18층 아파트가 정면으로 보이고 그리 넓지 않은 도로를 따라 기관건물들과 주상복합건물들이 질서 있게 배치된 그리 크지 않은 도시가 나를 맞아주었다. 마스크를 하고 천으로 만든 백(배낭)을 진 사람들과 자전거와 그루마가 분주히 오가고 가끔 먼지를 날리며 달리는 택시와 화물차가 보이는 평범한 도시이다. 포장이 되어 있음에도 차가 달릴 때 먼지가 날렸다. 내가 탄 바이크에도 그리고 날개옷도 먼지가 장난이 아니다.
평안남도의 국영축산
우리가 도착한 곳은 도, 인민위원회, 도 안전부, 도 보위부 등 도급기관 청사가 밀집되어 있는 평성시 덕성동에 자리 잡은 평안남도 인민위원회 국영목장관리국 청사이다. 왜인지 살짝 어두운 느낌을 주는 청사 앞에서 아담한 체구에 웃을 때 가지런한 흰 이가 눈길을 끄는 중년의 사내가 관리국기사장이라고 하면서 손을 내밀었다.
“오시느라고 수고가 많았습니다.”
기사장은 소박한 체구와 어울리지 않게 우렁우렁한 목청으로 인사하면서 우리를 국장실로 안내 했다.
<사진 2> 평성시 덕성동에 위치한 평안남도 인민위원회 국영목장관리국(출처: 구글어스)
관리국은 딱 봐도 오래된 건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낡은 3층 청사이다. 다른 도시들에 비하면 신도시이기는 하지만 도시가 형성 된지 50년이 훌쩍 넘었으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사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어 국장실이 있는 3충까지 계단으로 올라갔다. 후에 안 일이지만 평성에는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건물이 없다. 도의 노동당청사와 인민윈원회 등 모든 기관청사들에도 엘리베이터가 없다고 한다.
착찹한 생각을 정리하며 3충의 국장실에 들어서니 해맑은 인상의 “국장동지”가 책상에 앉아 있다가 급하게 일어서며 우리를 친절하게 맞아 주었다. 먼저 농업성에서 함께 온 안내자가 나에 대하여 간단히 소개를 했다. 서로 소개와 인사가 끝나자 국장은 사무실에 걸려 있는 평안남도의 행정지도 앞으로 다가서 평안남도와 국영목장관리국에 대하여 설명을 시작하였다.
"평안남도는 산지와 낮은 벌, 구릉 해안, 간척지 등 여러 가지 지형요소들 이루어져 있는데 대체적으로 동부에서 서부로 가면서 점차 낮아지는 지세를 이루고 있다. 또한 적산온도로 볼 때 비교적 높은 온열조건을 요구하는 농작물재배에 유리하여 사료원천이 풍부하고 가축들의 생활환경에 좋은 조건을 만들어 주어 축산물 생산에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평안남도 지역은 도내의 각지에 돼지, 닭, 오리, 소, 염소 목장들이 건설되어 축산업의 물질·기술적 토대가 북한지역에서도 비교적 잘 되어있는 지역이다. 도에서는 국영축산과 협동농장축산, 집단사육과 분산사육을 결합하여 축산을 하고 있다." -『조선향토대백과』 3 평안남도1 (한국평화문제연구소, 조선 과학백과사전출판사,)2004, 43쪽
관리국 기사장은 “자연사료 원천이 풍부한 산간지대에서는 소, 양, 염소와 같은 초식가축을 위주로 하면서 돼지와 가금을 사육하고 있다.”고 자랑도 했다. 예를 들어 맹산군의 긴벌덕, 상수동덕, 민봉덕, 회창군의 중골덕, 백년산덕과 같은 곳에서는 방목에 유리한 조건을 활용하여 초식가축을 방목하여 성과도 있다는 것이다.
북한은 해방 초기부터 축산업에 관심을 가지고 축산부문행정지도기관을 설치하였다. 1947년 3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농림국 축산부가 생기고 각도 인민위원회 농산국에 축산부가 있어 정부의 축산정책을 작성하고 집행하였다.2)
전쟁 이후 생산관계의 사회주의적 개조가 완성되고, 축산물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1965-1966년에 축산업의 전문화, 국영화를 위해 국영목장들을 증가되고, 각도에 종축장도 신설되었다. 1965년부터 1970년대 초까지 축산업을 지대별, 가축별로 전문화한 국영목장들과 국영축산기업소(소, 돼지, 닭, 오리공장 등)들이 신설되었고, 축산업의 규모가 커지게 되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북한정부는 1965년에 내각에 국영가금총국을 설치하고 가금목장들에 대한 행정기술적인 지도를 강화하였으며 방대한 자금을 투자하였다. 이에 대하여 조선중앙통신사에서 해마다 발간하는 『조선중앙연감』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현대적인 설비를 가진 대규모 닭 목장들을 건설하기 시작하여 일부 목장들을 조업시켰으며 앞으로 대규모건설을 계속할 준비도 진행하였다. 이미 있던 목장들에서는 전문화, 집약화를 성과적으로 실행하였다.”3)
1977년 1월 27일 진행된 가금 및 축산일군 협의회에서 중앙이 통일적으로 관리하던 국영목장들과 축산기업들을 각도에 가금 및 축산관리국을 설치하여 관리할 데 대한 김일성의 지시에 의하여 각도 국영축산을 관리하는 국영목장관리국이 생겨났다. 평안남도 국영목장관리국은 국영축산 목장들과 공장들에 대하여 행정·기술적으로 지도하고 관리하는 기구로 정식명칭은 “평안남도 인민위원회 국영목장관리국”이다.
도 국영목장관리국은 내각 농업성 축산관리국과 도 인민위원회에 직간접적인 지시와 통제를 받는다. 관리국은 평안남도내의 국영축산의 경영관리전반에 대한 책임을 지고 국영목장과, 공장들의 행정·기술 관리와 축산물생산계획 작성 및 하달, 종축보장, 수의방역, 사료공급, 노력보장, 재정관리, 자재공급과 축산물 판매 및 공급을 계획하고 집행하는 행정기술지도 기관이다.
국장이하 61명이 근무하고 있다. 국장 아래에 계획과 생산을 담당한 기사장과 행정관리를 담당한 행정부국장 설비관리 및 자재보장, 관리국 내 경리업무를 총괄하는 자재부국장이 있다.4) 산하에 1개의 배합사료공장과 9개의 닭 공장, 5개의 오리 목장, 1개의 국영돼지공장, 1개의 돼지종축장, 1개의 토끼종축장, 1개의 염소전문목장, 2개의 젖소목장 등이 있다.
1960년대 말부터 평안남도의 축산업부문에서는 돼지공장, 닭공장 등 대규모 축산시설들이 만들어지고 시설의 현대화와 대학을 졸업한 우수한 전문가들이 배치되면서 도내 축산물생산에서 일정한 성과가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부터는 경제난으로 식량부족과 사료 사정의 악화 등으로 평안남도의 축산업도 침체상태에 들어서게 되었고, 최근 들어 초식가축위주의 축산정책과 새로운 기업관리체계가 도입되면서 일부 공장들의 개건 현대화를 진행하였지만 아직 원만한 수준은 아니다.
나는 국장님에게 도의 축산업을 운영하면서 가장 애로 되는 것은 무엇인가고 물었다. 50대 후반의 국장은 “제일 부족한 것은 사료와 수의약품”이라면서 말을 아꼈다. 국장의 안내로 관리국청사내부에 있는 연구실과 사무실을 돌아보고 다음 취재를 위해 서둘러 청사를 나섰다. 다음 취재 목적지는 관리국 청사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평안남도 협동농장경영위원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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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70년대 평양-평성-순천간 1급도로 건설을 하면서 산 중턱에 도로가 통과하면서 10만산 대발파를 진행한 것을 이유로 평성사람들은 이 고개를 10만산 고개라고 부른다.
2)『노동신문』 1997년 11월 22일
3)조선중앙연감 1966-1967(평양: 조선중앙통신사, 1967) 216쪽
4) 경리부국장이라고 부르는데 목장관리국 사업에서 연료와 원료 생산자재 등의 보장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에 자재부국장이라고 많이 부른다.